생명의 긍정과 환희의 풍경―박구환의 판화 이성희(철학박사, 시인)
찍혀진 판화 앞에서 우리는 그 얇은 한 장의 피부 밑에 더디고 땀이 배는 힘든 작업공정의 신경과 핏줄, 그리고 기관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것은 회화 작품 앞에서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특히 목판화 앞에서 우리는 근육을 긴장하게 하는 촉감을 느낀다. 작가의 근육이 나무에 가하는 긴장과 힘, 그리고 칼날에 깎여나가는 나무결의 저항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소위 칼맛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박구환에 판화 작품 앞에 서면 이 느낌은 조금 달라진다. 그의 판화에는 날카로운 칼맛이 부드러운 선과 색채 속에 갈무리 되어 있다. 목판화 앞에서 이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유별난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는 섣불리 그의 작업이 그처럼 부드럽고 손쉬운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한 평자가 명명한 것처럼, 그의 작업 과정이 표현하고 싶은 색채의 수만큼 여러 차례 베니아판을 새기고 찍고 소멸시켜가는 ‘소멸기법’이라면 그것은 일반적인 목판화의 과정보다 더욱 힘들고 더딘 땀의 과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무판 위에 수많은 세계와 우주가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지난한 과정이 한 장의 풍경을 탄생시킨다. 안으로 숱한 소멸 과정을 품고 있는 저 평화롭고도 활기 찬 형상의 세계는 경이롭다. 고단한 작업공정 위에 새겨진 박구환의 풍경과 색채는 밝고 명랑하고 즐겁다. 어떤 격정의 감정도 삶의 세계를 위협하는 자연의 난폭한 힘도 보이지 않는다. 남도 바닷가의 평화로운 마을과 봄날의 화사한 꽃들을 달고 있는 나무들에는 생명의 긍정과 즐거움이 스며들어 있다. 박구환의 풍경은 우리가 버리고 떠나버린 고향의 풍경이기도 하고, 또한 숨 가쁜 우리네 삶의 시간들이 두터운 지층의 무게로 덮어버린 마음 심층의 고요한 풍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명랑한 색채와 부드러운 선들이 만들어 내는 고요한 즐거움을 그저 유치한 순박함이나 표피적인 장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인도의 옛 경전에서는 우리 자아의 심층을 3단계로 나눈다. 가장 표층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음식으로 된 나’이고, 그 다음 층을 이루고 있는 것은 ‘호흡으로 된 나’이다. 그리고 가장 심층은 이루고 있는 것은 ‘환희로 된 나’이다. 박구환의 풍경에서 만나는 명랑함과 즐거움은 오히려 이 심층의 환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가 10년 동안 집요하게 작업해 왔던 <소리의 바다(sea of sound)> 시리즈를 보라. 그것은 바다의 소리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존재들이 품고 있는 내면의 소리들이 이루어내는 소리의 교향악, 생명의 심층 파동들이 만드는 바다이기도 한 것이다. 그 소리의 바다에서 우리는 고요한 환희를 만날 수 있다. 박구환의 소리들은 도시의 삶에서 우리 몸을 지배하는 저 숱한 경적과도 같은 소리들이 아니다. <소리의 바다>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도시의 소음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가 포기해 버린 소리의 말초신경을 되살려야 한다. 소리의 말초신경을 되살린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고요해 지는 것이다. 고요해 질 때 비로소 무뎌진 감수성이 되살아나고 우리는 모든 생명의 심층에서 울려나오는 미세한 파동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소리의 바다>는 우리를 소리의 근원인 생명의 파동으로 초대한다. 바다의 잔물결 위에 부서지는 햇살의 파동, 나뭇가지가 흔들림, 풀들의 수런거리는 속삭임, 땅의 결이 이루는 파동, 나무의 춤, 풍경이 풍경을 부르는 손짓, 단순화되는 형태들의 떨림, 자연의 존재들이 소리와 색채 사이에서 진동하는 공감각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것은 고요함 속에서 만나는 소리의 현상학이면서 소리의 존재론이다. 이 다양한 소리의 풍경들은 실상 한 파동의 다양한 변주이다. 그 전체를 관통하는 숨은 파동은 바로 생명의 긍정과 환희인 것이다. 생명의 긍정과 환희는 봄날의 꽃에서 가장 눈부시게 진동한다. 이번에 전시되는 <만개하여(in full bloom)>가 그것이다. 만개된 꽃들보다 생명의 긍정과 환희를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게 어디 있으랴. 그런데 <만개하여>는 기존의 다른 시리즈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조형의 세계를 보여준다. 다른 시리즈의 작품에서는 화면을 꽉 채운 형상과 원색의 색채들이 알몸 그대로 뛰놀고 있다면 <만개하여>에서는 마치 우리 전통의 수묵 담채화로 그려진 사군자의 매화 그림과 유사한 세계가 전개되고 있다. 수묵화의 붓선과 같이 기운생동(氣韻生動)의 힘으로 충만한 채 공간을 분할하며 뻗어나가는 나뭇가지들과 그 선만큼 풍요로운 여백이 새로운 조형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 선과 여백, 흑과 백의 사이에 꽃이 만개 하여 있다. 전통 수묵화에서 부드러운 붓이 칼과 같은 힘을 품는 골법(骨法)이 있다면 박구환의 날카로운 칼은 붓과 같은 부드러움을 품는다. 칼과 같은 붓과 붓과 같은 칼이 만나서 여는 새로운 조형 공간을 우리는 만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만개하여>는 단순히 전통 수묵화를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뭇가지 뒷면에 그림자와 같은 실루엣이 선과 형태의 여음을 이루면서 전통 수묵화의 화훼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공간의 깊이와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여기에서 박구환의 공간은 확장된 깊이의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 숨 가쁜 속도주의와 파괴된 고향과 자연, 그리고 기후 교란이 생명을 위협하는 오늘날 박구환의 판화를 만나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하이데거는 시인의 사명은 귀향이며, 시를 짓는다는 것은 최초의 귀향이라고 하였다. 고향이란 생명의 근원이다. 이런 의미에서 박구환은 우리를 생명의 환희가 흐르는 고향으로 데려가는 시인이다. 우리는 박구환의 판화 속에 새겨지고 싶다. 그 속의 소리와 색채로 흔들리고 싶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생명의 긍정과 환희를 되찾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