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현실과 만나는 허구의 사다리_이선영 미술평론가

현실과 만나는 허구의 사다리

이선영 미술평론가

 

박구환은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가고 있을 정겨운  방앗간의  모습을 자주 그렸다. 여전히 우리는 방앗간의 산물, 즉 곡물이나 그 가공물을 먹고 살지만, 동네의 중심 역할을 하던 방앗간은 이제 눈에 띄지 않는 열악한 식품 가공 공장 등으로 숨어들지 않았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세간과 다른 중요도를 부여하는 것은 작가의 권리이기도 하다. 작품 [in full bloom](2019)에서 나지막한 건물 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오랫동안 그 건물과 함께 한 듯 어울리는 풍경이다. 새로운 요소가 첨가될 때 그곳의 공기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함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모든 풍경은 자리를 잡는다. 노랑은 붉은 계열의 바탕과 어우러지며, 작품에 따라 푸른 계열이 건물색 등으로 가세해서 파스텔 톤의 다채롭고도 부드러운 색감이 만들어진다. 다른 방앗간 소재의 작품들도 소재와 구성은 유사하다.

방앗간 건물과 나무, 사람(들)이다. 자전거나 농기계, 강아지 등이 첨가되기도 한다. 그의 풍경은 자연스러운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건물과 나무, 그곳으로 가고 있는 사람의 비례가 합리적이지 않다. 그의 풍경에는 나무보다 적은 산도 있다. 대상의 중요도도 제각각이다. 작가는 나무의 표현에 있어 꽃이나 잎을 매우 자세히 그리고 풍부하게 재현한다. 곧 낙엽이 질 누르스름한 단풍에 ‘개화’라는 역설적 제목을 붙인 것은 자연의 풍요가 그것의 순환에 있음을 말한다. 박구환은 2018년 한 잡지에 쓴 글에서 ‘생명의 결실을 의미하는 화려한 꽃이 만개한 나무들’을 언급한다. 나무의 위상은 배경을 거의 평면으로 처리하는 것에 비한다면, 묘사의 정도에 차이가 ...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방앗간을 오가는 이들이 자연에 바라는 풍부함 같은 것이 투사된 결과다. 작가의 기준에 자연은 문명이나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크며, 세계의 중심 같은 존재감을 가진다.

나무가 이전에는 풍경의 배경에 있었는데, 요즘은 주인공이 된 듯 한 변화가 보인다. 그가 십수년 전 자연 속에 작업실을 짓고 나서의 변화가 반영됐다. 고향 장성의 옆 동네인 담양의 작업실 창문으로 동네의 나무들이 보인다. 하지만 유년 시절 몇 년을 제외하고는 자연이 그의 삶에서 주요 배경은 아니었다. 도시인에게 자연은 휴양지나 여행지로 각인되어 있으며, 작가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구환은 자신의 언어를 발견하면서 재발견한 자연을 지척에 두고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적인 이미지가 작품으로 선취 되었고, 그와 유사한 현실에 자리 잡았으며, 그곳에서 그는 있지도 없지도 않은 어떤 세계에 대한 상을 만들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따스하고 아름다운 그의 풍경은 안 보고 그린 것도 많지만, 개별적인 요소들은 본 것들이다. 작업실 큰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작품 속에도 편재한다. 작품 속 그곳은 ‘어디 같은데 아닌, 어디에도 없는데 있는’ 그런 애매한 그 장소다.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과 평행한, 현실과 닮은 그런 세계다. 특히 바다가 등장하는 풍경은 더 환상적이다.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허구라면 그의 풍경은 완전한 허구도 아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이상세계는 섬으로 가정된다. 그 섬은 이 세계 밖의 특이한 장소에 놓여지는 것이다. 육지에서 섬으로, 또는 섬에서 또 다른 섬으로 보는 시점이 있는 박구환의 작품은 유토피아로서의 토포스를 가진다. 특히 그 내부가 정원같이 화사한 꽃으로 가득하다는 점도 그렇다. 신화학자 진 쿠퍼에 의하면, 많은 전통문화에서 낙원(paradise)은 ‘둘러싸인 정원’, 정원을 이루고 있는 섬, 또는 ‘녹색의 섬’이다. 그에 의하면 낙원이란 원초의 완전성과 황금시대의 상징이며 우주의 중심, 태고의 더럽혀지지 않은 무구함, 지복, 신과 인간, 그리고 모든 생물의 완전한 교류를 의미한다. 그의 작품에서 지상과 하늘을 잇는 듯 거대하게 표현된 나무는 그러한 교류가 일어나는 성스러운 중심이 될 수 있다.

전답田畓 이 고될 수도 있는 노동을 상기시킨다면, 나무로 대변되는 열매는 채집의 대상으로, 좀 더 여유 있게 보인다. 나무가 반드시 함께 하는 방앗간을 그리기 위해 전국의 방앗간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상상적 구성이지만 추상화는 아닌 그의 작품 속 명확히 알아볼 수 있는 대상들은 작가 말대로, ‘있어’ 라는 신호만으로 충분하다. 그의 작품 속 주요 도상은 나무, 바다(에는 등대와 배 있다), 들판(의 밭메는 여자, 최근에는 꽃구경하는 사람들, 관광객과 방문객 등)이다.

 

그의 작품은 일정한 요소가 조합되는 방식으로 마치 놀이와도 같은 방식을 따른다. 특히 꽃이 만개한 그의 풍경은 유토피아를 떠오르게 하는데, 이에 대해 자연과의 조화만을 봐서는 안될 것이다. 박구환에게도 자연과의 조화는 희망 사항이었지 현실은 아니었다. 1970년대 말부터 그림을 그려왔던 그가 자연과 화해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간 역사에서 자연의 위상 또한 마찬가지다.

소풍 갈 수 있는 자연, 그래서 풍경화가 번성한 시기는 근대에서야 가능했다. 인류학자 로제 카이유와는 [놀이와 인간]에서 자연의 무질서 상태를 규칙이 따르는 세계로 바꿀 필요가 있을 때 놀이가 제공하는 모델은 그러한 세계를 앞질러 보여준다고 본다. 놀이라는 수단을 통해 인간은 자연의 단조로움, 결정론, 맹목성과 난폭함에 저항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박구환의 작품에 영원한 봄만 등장하는 이유다. 바다 또한 맑은 하늘처럼 고요하다. 카이유와는 [인간과 성]에서도 유희와 정정당당한 승부, 의식적으로 설정되고 자유롭게 준수되는 규약 없이 문명이란 없다고 말한다.

또 다른 놀이 이론가 호이징가는 [호모 루덴스]에서 성聖 - 속俗- 유희라는 하나의 서열을 규정한다. 성聖과 유희는 둘 다 실제적인 삶에 대립된다는 사실에서 결합된다. 카이유와에 따르면 유희는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은 단번에 유희를 부서뜨리거나 일소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롭다’는 개념과 ‘세속적’이라는 개념이 많은 언어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전형적으로 자유로운 행위인 유희는 성스러움과 비교해 볼 때 세속적인 것이지만, 삶과 비교하면 쾌락과 기분전환일 뿐이다. 호이징가에 의하면 놀이의 경계선 밖, 즉 인생이란 일종의 정글로, 거기에서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유희의 이러한 안정감은 기쁨, 초연함, 편안함을 낳는다. 유희 속에서 모든 사태들은 사람들이 그것에 부여하는 중요성만 가질 뿐이며, 사람들은 자신이 동의한 만큼만 연루되고, 자신이 원할 때 는 언제나 그만둘 수 있다. 놀이는 위험조차도 선택된 것이며, 미리 한정된 것들이다.  유희의 조건과 목표, 결과는 인간이 설정하기 때문에 여유와 냉정함, 유쾌한 기분이 나온다는 것이다. 반면에 인생에서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더 이상 하나의 유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이 문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들이 밝힌 문화와 놀이의 관계는 박구환의 작품이  대중과의  소통에  성공한 이유를 암시한다.

작가는 스스로 만든 화면들 안에 알아보고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을 조합하면서 놀이하고관객에게도 그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든 규칙은 소재의 조합 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관철된다. 판화와 유화가 복합되는 방식은 엄밀하고 노동강도가 높으면서도 그 결과를 작가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에게도 흥미진진한 놀이이다. 기존의 요소에 최근 가세한 소재는 방앗간이다. 그가 기억하는 방앗간은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중심이었다. 소통의 장이기도 한 공동체의 상징이었다. 나무가 있었고 지천에 꽃밭이 있었다. 대부분의 풍경은 작가가 본 장면이지만 사진 같은 기계적 도구를 쓰지 않고 눈에 넣어온 기억에 의지한다. 그가 사진기를 드는 순간은 세부의 확인을 위해서 재방문을 하는 경우에 한한다. 이 기억과 저 기억이 한 화면에서 혼합될 수 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맥루한)라는 언명도 있지만, 사진과 영상 인플레 시대에 우리의 지각 또한 기계에 영향을 받는다.

육안이 포착하지 못하는 비인간이고 기계적인 시점들이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잠식해 가고 있다. 박구환은 그저 자신이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왔던 것만 작품으로 꺼내 보인다. 그의 풍경에는 그려진 것만큼이나 삭제된 것이 많다. 그의 작품은 대개 단색으로 처리된 배경이 특징이다. 판화와 유화가 결합 된 그의 독특한 형식은 공간표현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붓으로만은 가능하지 않은 표면은 시간성을 표현한다. 풍경 속 낡아가는 지붕이나 벽에 새겨지는 시간의 흔적처럼 말이다. 찍혀지거나 칠해졌지만, 여백처럼 대상을 품고 있는 공간감은 동양화의 구도도 생각나게 한다. 실제로 그는 화면의 중심에 동양화의 매화같이 절묘하게 각도를 틀고 자리한 형상을 배치하기도 한다. 여기에 인간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있는 경우 매우 작아서 더욱 동양화같은 구도다. 서양미술이 고대부터 인간이 차지한 위치와 비교한다면 동양화에서 인간은 중심에 있지 않은 것이다.

유화가 포함되기에 겉으로는 ‘서양화’인 박구환의 ‘원근법’은 ‘과학적’이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비약이 많다. 여러 기억이 조합된 작품이다 보니 불연속성이 있으며, 모노톤의 여백같은 배경은 그러한 불연속성을 여유 있게 품어준다. 가령 방앗간이나 나무만 그려진 작품들에서 땅과 하늘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바다가 등장하는 풍경 또한 실제로는 불가능한 정경일 경우가 많다. [회상] 시리즈는 원경 부근에 바다가 자리한다. 그 또한 원근법적으로는 이상하지만, 작가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한 바다는 풍경의 요소로 빠지지 않는 것이다. 전경에 여러 겹으로 낮은 산 또는 언덕들이 켜켜이 자리하고 그 연장선으로 섬들도 보이며, 다른 작품의 여백에 해당되는 부분이 바다가 자리한다. 실제로 그에게 바다는 힘들 때 자신을 보듬었던 여백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인지 등대는 빠지지 않는다. 박구환은 ‘작가로서의 삶이 몹시도 힘들었던 시기, 도피처로 찾았던 곳에서 만난 바다는 마주하고 서 있으면 알 수 없는 평온으로 다가왔다’다’(2018)고 밝힌 바 있다.

바다는 풍경의 한 요소지만, 그에게는 희망이라는 상징성을 가진다. 실제로 그는 도시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작품 속 그곳은 고향도 아니고 살았던 곳도 아닌, 요컨대 그에게도 희망적인 풍경이다. ‘가끔 관람객이 작품을 보면서 본인이 생각하는 지명을 말하며, 그곳이 아니냐고 묻곤 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에 부정도 긍정도 아닌 대답을 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굳이 고백하자면 나의 작품 속 풍경은 누구나의 고향이면서 동시에 누구의 고향도 아니다’ 광주 속삭임 2018년 여름호 그의 작품은 소위 말하는 ‘구상’이지만 존재론적인 불확실성이 농후하고, 작가도 굳이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비슷한 미학적 전략을 썼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했다면, 박구환의 작품 또한 실제의 풍경이 아니다. 미셀 푸코는 르네 마그리트 작가론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에서, (재현의 범주인)유사하다는 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 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반면 비슷한 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달라지면서 퍼져 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된다고 대조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박구환의 작품들은 특정 풍경을 재현한 것이 아니다. 수지 개블릭은 [르네 마그리트]에서 재현이란 언어묘사와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는 그림이라고 하면서, 유사성은 실제로 비슷한 것보다 우리의 정신 구조나 표현방식에 의해 좌우된다고 지적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박구환의 작품은 상상이며, 특히 상상의 원동력인 놀이적 방식을 잘 보여준다. 조지 쿠블러는 [시간의 형상]에서 ‘우리는 계층, 유형, 범주에 의한 일치라는 개념으로 우주를 단순화시킴으로서 그리고 무한히 계속되는 불일치하는 사건을 유사함이라는 한정된 체계 속에서 재배열함으로서 우주를 파악할 수 있다. 어떠한 사건도 결코 반복하지 않는 것이 존재의 속성이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동일성에 의해서만 그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생각의 속성이다’ 라고 말한다.

실제 같지만 아닌 그의 풍경은 붉은 꽃이 만개한 작품에 푸른색으로 바탕을   채운 작품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그 안의 사람들의 동작은 육지에서의 모습인데, 그들은 공중에 떠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산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풍경은 있음직 하지만, 작품 제목 ‘회상 回 想 ’ 처럼 여러 가지가 조합된다. 기억은 영화처럼 시공간을 편집한다. 바다가 보이는 풍경에 관객을 입장시키는 역할은 중간부터 표현된 전경의 나무다. 띄엄띄엄 있는 낮은 집들은 밀집된 고층 건물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그의 작품은 기업에서 달력에 실리는 작품으로 초대할 만큼 인기를 끌기도 했다. 화사하게 만개한 꽃들로 가득한 그의 작품은 영원한 봄만 있는 밝은 풍경을 이루며, 관객에게 치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던 젊은 시절 그의 작품은 매우 어두웠다. 1980-90년대 그의 작품은 추상과 구상, 표현주의 등을 넘나들며 괴기스럽고 거칠며 냉소적인 터치로 현대사회를 표현했다.

자연을 발견한 이후 음지에서 양지로의 도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박구환은 원래 자연을 좋아했는데. 한참을 헤어져 있다가 다시 자연을 만난다. 자연은 작가의 주변에 있는 것이었지만, 알고 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인 것이다. 작품 속에는 자연에 깃들여 사는 인간군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서 대중과의 소통과도 이뤄냈다. 그에게도 대중에게도 자연은 즐거움이고 희망이었다. 특히 그로 하여금 ‘예술가의 책무’를 새삼 생각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한 병원에 판매된 판화를 보고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얻은 환자를 알게 된다. 판매나 전시를 통해 누구에게 보여질지 확정할 수 없는 작품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배설물을 배출하고 해명까지 해야 하는’ 현대미술과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만족스러웠다는 점이 회상回想 이나 만개滿開 시리즈가 지속된 이유다. 1991년 1회 개인전을 기점으로 본다면 강렬함에서 평온함으로의 변화이다.

그 사이에 판화 매체의 발견이 있었다. 20대 중반, 순수미술로 삶이 가능할 것인지 회의하던 그는 문화재 수복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판화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후 독학으로 판화기법을 체득했다. 미술계에서 박구환을 먼저 알린 것은 판화가로서이다. 판화를 통해 먼저 대중과 소통하면서 밝고 희망적인 도상이 나오게 됐다. 그는 붓질로는 가능하지 않은 판화만의 미묘함을 강조한다.

물감이 압착 될 때의 고유한 느낌은 그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실에는 판화 작업을 위한 베니어판들이 많이 쌓여있다. 작가는 판재가 가진 특성, 즉 판으로 압착될 때의 질감을 살려내고자 한다. 프레스기의 압력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는 오직 작가의 느낌만이 나침판이 된다. 하지만 판화로만은 충분치 않고 유화 작업이 더 필요한 것은 판 작업의 단점인 이분법적 딱딱함 때문이다. 판 작업에 더한 붓질은 ‘부드러움과 여유를’ 찾을 수 있게 한다.

박구환의 작품은 양자의 절충이다. 떼어내고 덧붙이고 하는 과정의 거듭된 교차는 그의 작품에 자연과도 같은 겹을 부여한다. 찍는 부분과 붓질할 곳은 매번 선택해야 하며, 원본을 봐야만 두 형식의 비중을 찾아낼 수 있다. 판화는 복제 매체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소멸기법’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과정 탓에 작가조차도 똑같은 작품을 다시 만들 수 없다. 원하는 형상이 제대로 나올 때까지 여러 번을 찍어야 한다. 그리기와 찍기가 교차되며 10여 단계를 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박구환은 중학교시절부터 그림을 그려왔고, 판화의 발견 이후 작업의 방법론도 탄탄하게 구축해왔지만, 여전히 불확실한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불확실성은 허구 뿐 아니라 현실의 특징이기도 하다. 불확실성은 고통 또는 낭비일 수 있지만, 희열 또는 창조일 수 있다. 불확실함은 박구환에게 놀이이자 작업이 지속되는 이유다. 분명한 것은 인간이 현실과 직접 만날 수는 없고, 허구라는 사다리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화면 속의 느림의 미학

고요, 정적, 내면의 울림, 평화 등등. 한없이 편안하다. 아닌게 아니라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그 들판 너머로 바다가 있는 풍경, 자연스레 시가 떠오른다. 그야말로 현대가 요구하는 질주, 속도, 빠름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질주하면서 상처받은 영혼들을 어루만져주는 따뜻함이 우러나온다. 다름아닌 판화가 박구환씨의 작품 내용이다. 

그의 판화를 들여다보면 바쁘게 살아온 우리에게 아무 조건 없이 너른 어깨를 척 내주며 안기라 한다. 느긋하면서도 서정적인 풍경은 그렇게 어서 오라. 손짓한다. 

 

 

화면 속의 느림의 미학 

우리는 그동안 내달리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불안한 마음에 질주해왔다. 그 방향의 끝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내달렸다. 우리가 거둔 성장, 발전 등은 그 결과로 얻은 부산물이긴 하다. 그러나 그게 긍정적이기만 했을까. 아니다. 성장의 그늘이 짙다는 것을 뼈아프게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소소하지만 중요하고도 가치 있는 것들을 놓쳤다는 상실감마저 컸다. 

때늦은 움직임이 일었다. 본질적인 질문을 날카롭게 들이대며 시정을 요구하는 움직임이다. 그 중 하나가 슬로우시티운동이다. 물론 쾌속 질주의 반작용이 심각하게 드러남으로써 속을 차리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바른 방향을 잡았다는 비판이 제기되지만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판화가 박구환은 일찍이 그걸 알았다. 그의 작품엔 전 세계가 뒤늦게 화들짝 놀라며 외치고 있는 "느리게 살기"가 진즉부터 꿈틀거리고 있다. 

슬로 시티운동이요? 전 90년대 초반부터 그걸 작업에 담아왔어요. 단순히 목가적인 풍경만은 아니다. 곪아 터져있는 것을 감추듯 포장하려는 차원의 서정성이 아니다. 오히려 쓰라린 상처를 어루만지는 해원의 서정성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의 작업이 빛나는 이유다. 그래서 그의 풍경 판화가 요즘 뜨는지도 모른다. 

특히 대만에서 알아봐준다. 그곳에서 초대전을 벌일 때마다 전시작 완매 행진을 거듭한다. 초대전, 기획전은 물론 국내외 아트페어에서도 그를 불러제킨다. 아니, 도저히 안돼 못하겠다며 손사래를 칠 정도다. 그 일정을 모두 소화하려면 그가 지향하는 "느리게 살기"가 안돼 갈등에 휩싸이기도 한다. 

 

 

생명의 긍정과 환희의 풍경-이성희

생명의 긍정과 환희의 풍경―박구환의 판화
이성희(철학박사, 시인)

찍혀진 판화 앞에서 우리는 그 얇은 한 장의 피부 밑에 더디고 땀이 배는 힘든 작업공정의 신경과 핏줄, 그리고 기관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것은 회화 작품 앞에서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특히 목판화 앞에서 우리는 근육을 긴장하게 하는 촉감을 느낀다. 작가의 근육이 나무에 가하는 긴장과 힘, 그리고 칼날에 깎여나가는 나무결의 저항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소위 칼맛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박구환에 판화 작품 앞에 서면 이 느낌은 조금 달라진다. 그의 판화에는 날카로운 칼맛이 부드러운 선과 색채 속에 갈무리 되어 있다. 목판화 앞에서 이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유별난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는 섣불리 그의 작업이 그처럼 부드럽고 손쉬운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한 평자가 명명한 것처럼, 그의 작업 과정이 표현하고 싶은 색채의 수만큼 여러 차례 베니아판을 새기고 찍고 소멸시켜가는 ‘소멸기법’이라면 그것은 일반적인 목판화의 과정보다 더욱 힘들고 더딘 땀의 과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무판 위에 수많은 세계와 우주가 생성되었다가 소멸되는 지난한 과정이 한 장의 풍경을 탄생시킨다. 안으로 숱한 소멸 과정을 품고 있는 저 평화롭고도 활기 찬 형상의 세계는 경이롭다.
고단한 작업공정 위에 새겨진 박구환의 풍경과 색채는 밝고 명랑하고 즐겁다. 어떤 격정의 감정도 삶의 세계를 위협하는 자연의 난폭한 힘도 보이지 않는다. 남도 바닷가의 평화로운 마을과 봄날의 화사한 꽃들을 달고 있는 나무들에는 생명의 긍정과 즐거움이 스며들어 있다. 박구환의 풍경은 우리가 버리고 떠나버린 고향의 풍경이기도 하고, 또한 숨 가쁜 우리네 삶의 시간들이 두터운 지층의 무게로 덮어버린 마음 심층의 고요한 풍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명랑한 색채와 부드러운 선들이 만들어 내는 고요한 즐거움을 그저 유치한 순박함이나 표피적인 장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인도의 옛 경전에서는 우리 자아의 심층을 3단계로 나눈다. 가장 표층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음식으로 된 나’이고, 그 다음 층을 이루고 있는 것은 ‘호흡으로 된 나’이다. 그리고 가장 심층은 이루고 있는 것은 ‘환희로 된 나’이다. 박구환의 풍경에서 만나는 명랑함과 즐거움은 오히려 이 심층의 환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가 10년 동안 집요하게 작업해 왔던 <소리의 바다(sea of sound)> 시리즈를 보라. 그것은 바다의 소리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존재들이 품고 있는 내면의 소리들이 이루어내는 소리의 교향악, 생명의 심층 파동들이 만드는 바다이기도 한 것이다. 그 소리의 바다에서 우리는 고요한 환희를 만날 수 있다.
박구환의 소리들은 도시의 삶에서 우리 몸을 지배하는 저 숱한 경적과도 같은 소리들이 아니다. <소리의 바다>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도시의 소음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가 포기해 버린 소리의 말초신경을 되살려야 한다. 소리의 말초신경을 되살린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고요해 지는 것이다. 고요해 질 때 비로소 무뎌진 감수성이 되살아나고 우리는 모든 생명의 심층에서 울려나오는 미세한 파동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소리의 바다>는 우리를 소리의 근원인 생명의 파동으로 초대한다. 바다의 잔물결 위에 부서지는 햇살의 파동, 나뭇가지가 흔들림, 풀들의 수런거리는 속삭임, 땅의 결이 이루는 파동, 나무의 춤, 풍경이 풍경을 부르는 손짓, 단순화되는 형태들의 떨림, 자연의 존재들이 소리와 색채 사이에서 진동하는 공감각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것은 고요함 속에서 만나는 소리의 현상학이면서 소리의 존재론이다.
이 다양한 소리의 풍경들은 실상 한 파동의 다양한 변주이다. 그 전체를 관통하는 숨은 파동은 바로 생명의 긍정과 환희인 것이다. 생명의 긍정과 환희는 봄날의 꽃에서 가장 눈부시게 진동한다. 이번에 전시되는 <만개하여(in full bloom)>가 그것이다. 만개된 꽃들보다 생명의 긍정과 환희를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게 어디 있으랴.
그런데 <만개하여>는 기존의 다른 시리즈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조형의 세계를 보여준다. 다른 시리즈의 작품에서는 화면을 꽉 채운 형상과 원색의 색채들이 알몸 그대로 뛰놀고 있다면 <만개하여>에서는 마치 우리 전통의 수묵 담채화로 그려진 사군자의 매화 그림과 유사한 세계가 전개되고 있다. 수묵화의 붓선과 같이 기운생동(氣韻生動)의 힘으로 충만한 채 공간을 분할하며 뻗어나가는 나뭇가지들과 그 선만큼 풍요로운 여백이 새로운 조형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 선과 여백, 흑과 백의 사이에 꽃이 만개 하여 있다.
전통 수묵화에서 부드러운 붓이 칼과 같은 힘을 품는 골법(骨法)이 있다면 박구환의 날카로운 칼은 붓과 같은 부드러움을 품는다. 칼과 같은 붓과 붓과 같은 칼이 만나서 여는 새로운 조형 공간을 우리는 만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만개하여>는 단순히 전통 수묵화를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뭇가지 뒷면에 그림자와 같은 실루엣이 선과 형태의 여음을 이루면서 전통 수묵화의 화훼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공간의 깊이와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여기에서 박구환의 공간은 확장된 깊이의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
숨 가쁜 속도주의와 파괴된 고향과 자연, 그리고 기후 교란이 생명을 위협하는 오늘날 박구환의 판화를 만나는 일은 행복한 일이다. 하이데거는 시인의 사명은 귀향이며, 시를 짓는다는 것은 최초의 귀향이라고 하였다. 고향이란 생명의 근원이다. 이런 의미에서 박구환은 우리를 생명의 환희가 흐르는 고향으로 데려가는 시인이다. 우리는 박구환의 판화 속에 새겨지고 싶다. 그 속의 소리와 색채로 흔들리고 싶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생명의 긍정과 환희를 되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