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아름다움과 진실의 세계-김이천
아름다움과 진실의 세계
                                        
 김이천(미술평론가)

사람들이 얘기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마구 떠들어 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을 아끼면서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유창한 화술로 얘기하는 달변가가 있는가 하면, 어눌한 솜씨로 어설프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각기 다른 이들의 언어 속에는 진실과 거짓이 내재하기 마련이다. 말을 잘 하는 달변가의 얘기가 반드시 진실되고, 어설프게 얘기하는 사람의 얘기가 결코 거짓된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은 ‘진실’을 많은 사람이 공감하도록 말하는 사람이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잘 그린 그림은 단지 시각적으로 예쁘게, 보기 좋게 그려진 장식적인 그림이 아니라 ‘거짓 없이 바르고 참된’ 진실을 감동적으로 엮어 낸 아름다운 그림이다. 
 진실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다. 

아름다움을 다루는 미학에서 진실과 아름다움을 인류최고의 가치로 동등하게 인정하고 있듯이‘아름다운’미술은 곧 ‘진실’과 상통한다. 우리는 진실 되고 아름다운 얘기를 들을 때 가슴 찡한 감동을 느끼듯이 진실 되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면 감동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를 감동시키는 진실과 아름다움이 충만한 사회는 곧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작가 신호재 역시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기억과 현실, 그리고 가슴에 묻어둔 생각들을 진실 되고 아름답게 시각화하려고 노력하는 화가다 그 노력은 지난해의 첫 개인전에서 결실을 맺은 바 있다. 그때 그는 물과 불을 이용한 태우기, 뿌리기 같은 실험적 기법으로 우리가 입는 옷을 조직한 ‘씨’와 ‘날’ 같은 격자 무늬나 물방울처럼 도드라진 ‘엠보싱’ 효과를 화면 위에 연출하면서 자신의 삶과 생각들을 추상적인 이미지로 조형화 했다. 격자무늬의 직선과 엠보싱 효과의 곡면이 교차하면서 드러난 그 이미지는 딱딱함과 부드러움, 의도와 우연의 세계를 함축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이러한 상반된 이원적 세계는 작가를 포함한 인간의 내면과 세상사, 즉 삶과 죽음, 선과 악, 이상과 현실,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생산과 파괴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현실적인 형태가 전혀 없는 선과 면과 색으로 구성된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이미지 속에서 삶의 양면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작가 신호재는 재료 및 기법의 실험으로 4년간 천착했던 추상(抽象)에다 추상 작업 이전 10년 동안 몰두했던 구상(具象)을 정리해 덧붙이는 작업을 올들어 새롭게 시작했다. 여전히 이전 작품의 특징인 격자무늬나 엠보싱 효과가 남아 있고, 그 위에 사람과 주변 사물이 구체적인 이미지로 자리하는 추상과 구상의 결합이 특징이다. 이 같은 추상과 구상의 대비로 그는 기존에 자신이 추구했던 ‘아름다움’과 동시에 ‘진실’을 표상하고 있다. 한꺼번에 아름다움과 진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한계의식에서 출발한다. 인간과 세상사의 얘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려는 그의 표현은 이미 10여 년간 다졌던 탄탄한 구상력 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그림의 가치를 진실과 아름다움의 표상에 두고 있는 점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어두운 현실과 환함을 향한 염원이다. 

격자무늬나 엠보싱 같은 추상화된 이미지 위에 욕망을 담는 항아리나 생존의 도구인 아궁이, 촛불, 그릇, 솟대 같은 희망을 기원하는 제기(祭器)들, 그리고 여인, 부부, 노인, 농악하는 사람, 아코디언 연주가의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그려놓고 있다. 추상위에 어두운 색채로 드리워진 사람들의 표정은 주검처럼 싸늘하다. 그 싸늘함은 그러나 곧 희망의 노래로 전치된다. 현실은 비록 어둡지만 곧 밝은 미래를 기약하겠다는 의지가 여러 가지 제기들을 통해 암시된다. 어쩌면 이는 IMF의 한파로 실업과 불황에 빠진 실의 속에서도 꿋꿋하게 일어서려는 우리의 현실과도 흡사하다.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의미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염원이 상징으로 표상된 구상적 이미지들은 차분한 추상적 이미지와는 달리 매우 역동적이다. 그만큼 미래에 대한 의지가 강한 것이다. 

이것이 작가 신호재의 진실이고 아름다움이다. 
삶의 진실보다는 아름다움의 조형화에 방점을 찍어왔던 추상과 삶의 진실을 표상하는 구상을 한 화면에 대비, 조화시킴으로써 그는 자신의 삶은 물론 진실과 아름다움이 충만한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환상적인 청색의 역설-정금희
신호재 작품 세계
- 환상적인 청색의 역설(逆說) -

  신호재의 작품은 현실과 현실 속에 내포된 초현실을 청색의 환타지로 한데 불러 모은 듯하다. 화면 중앙이 청색으로 채색돼 있고 그 주위를 흰색이나 노란색 테두리로 둘러싼 작품은 현실과 가상의, 혹은 유(有)와 무(無)의 세계를 먼저 분별해 놓는다. 범 우주의 하늘을 연상시키는 청색 구체 안에는 온갖 생명체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것들은 연꽃과 정화수, 오리, 새, 산, 해, 별, 달, 물고기 등으로 화면 곳곳에 배치돼 민족성에 내재된 오래된 정서를 의식의 수면 위로 띄워 올린다. 대상들은 사실적 묘사가 아닌 비구상으로 단순화시켜 존재의 현대성을 잃지 않고 있다. 시원을 알 수 없는 시공의 흐름 속에서 작가가 머무르고 있는  한 지점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푸른색처럼 시리고 생생하다.
 
“무한히, 푸른색은 탈출한다. 
그것은, 엄밀히 빛깔이 아니다. 
그보다는 색조, 기후, 공기의 특별한 울림.
... 
우리가 마시는 공기,
우리의 얼굴이 움직이고 있는 허공의 실체. 
우리가 통과하는 공간. 
이 모든 것이야말로 보이지 않은 
지상의 푸른색이다”.              
                         장 미셸 몰프와의 시 <푸른색 이야기>중에서

  ‘엄밀히 빛깔이 아니’며 ‘색조, 기후, 공기의 특별한 울림’인 청색은 ‘허공의 실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이 공간은 푸르다. 그러나 신호재는 공간 안에서 보이는, 동력의, 당당한 푸름을 넘어 동시에 뒤편을 주시한다. 동양적 순환의 사고에서 비롯된 음양의 원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여자와 남자로 이루어진 세상은 상생의 관계에서 조화롭게 순환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흰색과 대비를 이룬 청색은 하늘을 상징하고, 흰색은 대지를 상징한다. 청색 사이사이에 노란 색점들은 밤하늘의 별밤을 연상시킨다. 그 하늘 아래 우주의 생명체들은 숨쉬고 나날이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세상은 존재하고 있으며 강물이 흐르듯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고 있으며 우리들의 인생 여행도 진행형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다. 신호재의 밤하늘을 상징한 짙푸른 청색에서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작품인 <별이 빛나는 론 강변의 밤 풍경>, <밤의 카페 테라스>에서의 그 밤하늘이 연상된다. 순수하고 청렴한 청색으로 채색된 하늘에서 별들의 찬란함을 볼 수 있듯이 신호재 작품의 일부에서도 그 유사함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작품 속 청색으로 뒤덮여 있는 하늘 아래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전개되고 있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화두로 삼고 찾아 떠나는 이들, 또는 세속의 부와 명예, 권력을 추구하며 발버둥치는 이들, 또는 사랑을 갈구하는 이들 등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살아가고 있다. 그 안에는 자식 사랑에 정화수를 떠 놓고 매일 기도하는 우리 어머니의 모성애도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작가는 무구한 삶의 형태에서 아가페의 사랑을 화면에 담아내어 잔잔한 감동을 주고자 한다. 
  작가는 현대인들이 물질 만능주의에 사로잡혀 황폐해 가는 감성에 ‘사랑’을 처방전으로 내놓고 싶은 것이다. 그 사랑은 인간애일수도 있고, 모든 생명체에 대한 생명의 존엄성을 되찾는 묘약일 수도 있다. 요즘 우리 현실에서는 흔히 가족 간의 사랑, 부부와 자식 간의 사랑 등이 소원해 지고 있음을 본다. 작가는 전통적인 소재인 정화수와 어머니의 지극 정성한 기도, 부부애를 상징하는 한 쌍의 새와 오리, 생명력을 나타내는 금붕어, 혼탁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순수함을 간직한 고귀한 연꽃과 변하지 않는 굳은 절개의 교목 등을 되찾아 고귀한 기억을 일깨워내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소재는 비구상으로 형태를 알아 볼 수 있게 묘사하면서 화면 구성은 청색과 흰색으로 이원화시켜 추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추상이란 사실적인 기법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그 차원을 뛰어 넘어 무구한 가능성을 주고 있기에 폭넓은 해석이 가능하다. 화면은 수직적인 이원화로 구성되어 있어 무한한 공간감을 주고 있으며 가끔 수평적인 선이나 새가 날고 있는 모습 등을 묘사하여 수직과 수평을 적절하게 배치시켜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는 화면에 모래, 석고 등의 다양한 재료를 혼합하여 화면에 재질감과 입체감을 더해 주고 있으며 이러한 실험 제작은 현대 미술과 동행하고 있다. 
  신호재 작품 경향은 아동미술에서 나타난 특징적 기법인 열거식 기법이나 시·공의 변화성 표현과 유사하게 나타난다. 어린 아이들은 미술 교육을 받기 전에 그들만의 시각에서 바라본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곤 한다. 그중에서 그들이 자주 사용한 표현 기법인 대상을 화면에 열거시킨 기법과 유사하게 신호재 작품에서도 화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즉 밤하늘, 나무, 새를 화면에 나란하게 배열한 것이다. 
  또한 아동들은 한 대상을 단편적으로 정지된 표현이 아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연속적인 표현을 시도한 기법으로 시공의 변화를 가져오곤 한다. 작가는 아동들이 교육 받기 전에 사용한 기법을 자신의 화면에 적용시켜 재현해 냈다. 언뜻 보기에는 대상을 미숙하게 처리하여 기교가 어설프게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어지러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눈에 보여진 대상 그 자체를 반영하여 재현한다는 의도를 담았다. 즉 작품에 본질적으로 순수함과 청정함을 깃들여 표현하고자 함일 것이다. 
  더불어서 신호재의 작품은 청색을 사용하여 무한한 공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의 소중함을 상징화시키고 있는데, 그의 작품 속의 청색은 모든 것을 내포하는 존재의 가치성을 부가하는 반면 아무 것도 없는 허무, 공(空)을 담아내는 역설(逆說)의 색채라 할 것이다. 

2007. 8. 10
정 금 희 (미술평론가. 전남대학교 교수)

새벽 샘물에 고이는 기도의 노래-김옥조
새벽 샘물에 고이는 기도의 노래

아직 새벽 공기는 차갑다 어둑어둑 사립문 밖으로 달빛이 지나간 다음, 세상을 깨우는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온다. 어머니다. 어머니는 고단한 가족들의 숨소리를 다독이며 기도하셨다. 언제나처럼 여명이 움트기 전 부뚜막에 앉아 두 손을 모으시는 것이다. 하얀 사기 그릇에 새벽 샘물을 길어 떠놓으시고 모두의 복을 빌었다. 정안수 였다. 그 맑은 정안수 그릇에 평생을 가도 지워지지 않는 어머니의 새벽 비손소리가 담기는 것이다. 소리 없는 어머니의 기도는 아무도 모르게 우리들을 키웠고, 세상은 그 힘으로 어려운 시절을 이겼다. 다시 부뚜막에 다가 앉아 변함없이 가족과 자식, 조상의 발복을 빌었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정안수 떠놓고 새벽을 여시던 우리의 신, 어머니여.

서양화가 신호재씨는 유년시절 보고 들었던 ‘정안수의 추억’을 줄곧 작업으로 풀어온 작가다. 대학시절을 포함, 본격적인 그림을 그 린지 20여년 가까운 화필의 이력을 보거나, 그가 아직 40대 초반의 작가라는 점을 보더라도 한 가지 주제에 너무 깊이 발을 집어 넣은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의 생각이 분명하다. 어떻게 그리느냐,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는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다. 늘 그의 가슴을 짓누른 숙제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쏠려있다.
물론 작가에게 있어서 표현의 방식과 가시적인 형태는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는 한시대를 살아가며 그 시대의 정신을 해석하고 표현하고 기록하는 예술가로서의 과연 무슨 메아리를 세상에 울릴 것인가에 사고의 중심을 둔 듯하다. 그것이 그의 회화관의 단면으로 느껴진다.

그는 말한다. “제가 정안수를 그림의 주제로 선택한 것은 어렸을 적 어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새벽에 부엌에서 정안수에 무엇인가를 비는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 겁니다. 그 그릇은 곧 고향이고 숙연한 마음이지요. 나와 가족, 사회의 안녕을 기원하던 토속적 향수를 불러 더욱 흥미가 있습니다.”
 그가 다루는 주제 ‘정안수’는 바로 이런 그의 회화적 시각과 취향을 들여다 보는 바로미터가 된다. 작가 스스로도 말하듯 정안수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에 대한 애젖한 그리움이고 나아가 비손과 기도, 믿음의 신앙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그가 그림으로 담으려는 ‘정안수’ 역시 어린시적 부뚜막에 웅크리고 앉아 아무도 모르게 새벽기도를 올리던 어머니의 그 심정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바로 염원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가 지성스럽게 화면 속에 모시는 ‘정안수’ 그릇은 다른 측면으로 보면 인류문명의 시작을 상징한다. 실용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그릇은 인류문명 최고의 기술력과 표현의지를 담고 있는 까닭이다.
 ‘정안수’는 깨끗한 물이다.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그 무엇도 섞이지 않는 순수한 생명수인 것. 게다가 모두가 잠들었다 서서히 깨어나는, 동이 움트기 직전의 정갈한 시간에 존재한다.
가장 숭고하고 간절한 열망을 모으는 행위의 공간도 제공한다. 
 그렇지만 그의 그림은 이런 의미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이중적 매력을 가졌다. 화면 속의 정안수는 오히려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마저 주기도 한다. 의도적인 표현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조형기법이나 화면 구성방식이 매우 서구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구상, 즉 추상화를 보는 듯 한 강렬한 색감의 대비나 공간의 분할은 극히 위압적인 상황을 자아내기도 하지 않나 싶다. 그 사이 사이에 정안수의 염원이 자리하는 까닭에 스치듯 봐서는 새벽기도의 그 맑은 염원을 끄집어 내는 일이 쉬울리 없어 보인다.
 “원래 사실적인 작업을 10년 이상 했습니다. 사실적인 표현은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추상은 나만의 대화입니다. 화면 상에서 추상과 구상이 엮어지는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현대 회화는 작가의 감성분출의 자율성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주제와 소재에 대한 고민을 작가 중심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기성의 회화관이나 표현방식의 거부하면서 ‘자기것’ ‘개성’ ‘독창성’ ‘차별성’에 의존하는 경향이나 재료의 다양성이 곧 이 같은 평민회화의 자유로움을 뒷받침해 왔다. 그는 이런 시대의 조류도 소홀히 하지 않는 까닭에 얼핏 보면 추상회화의 감각을 더욱 자극하는 요소가 있다.
  인생과 인간의 근본 문제를 고민하는 데서 출발한 이런 그의 회화적 단상을 때로 주제와 표현의 상층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주제와 현대적 표현력의 조화를 이끌어내는 긍정적 인상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솟대를 비롯 암각화의 이미지나, 명태를 그리고, 최근에는 별자리에도 관심을 돌리고 있다. 그는 민간신앙의 흐름을 좇으며 이 시대인의 감성을 건드리는 미학적 소질을 보여준다.
 구상과 비구상의 공존은 말할 것도 없고 색감에 있어서도 블랙과 화이트가 부딪치는 느낌, 안개 낀 밤의 정취처럼 블루톤의 이미지가 피어 오르는 공간은 시각적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유하 물감에서 잉크,페인트,크레용,아크릴 등 다양한 재료로 캔버스와 나무판까지 그의 표현 대상이나 재료가 된다. 최근 작품에서 흑백의 색감은 청색조로 흐르고 있다. 또 형태의 과감한 생략과 단순화도 특징적 변화로 꼽힌다.
                                   
                                   김옥조 (광남일보 문화팀장, 호남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