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역사처럼 흐르는 그의 작품드라마, 금강산과 그 폭포에서 깨달음 얻다_이석우(겸재정선미술관장)

역사처럼 흐르는 그의 작품드라마, 금강산과 그 폭포에서 깨달음 얻다

- 이석우(겸재정선미술관장)

   송필용 작가는 초년작가 시절부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나 역시 송필용의 작업과 삶, 그 작품세계의 변이를 비교적 오랫동안 지켜보아온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작가정신을 여물게 하고 생성의 토대가 된 담양시절은 송필용의 예술세계의 잉태지이자 앞으로의 방향을 예감케 한 시기이다. 돌담을 돌아가면 옛 우체국 자리에 화실을 열고 열심히 그리던 청년 송필용이 떠올려진다. 그때부터 특유의 자기세계를 갖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늘 신뢰감을 갖고 접근하였다.
   사람들이 서양화풍의 어떤 새로움에 흔들리고 있을 때, 그리고 과격한 미술 메시지를 전하려는 자석권에 끌려가고 있을 때,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자기 것을 찾겠다는데 확고히 서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서가에는 이미 겸재 정선에 대한 화집과 우리 전통미술에 대한 무게 있는 서책들이 그리고 고산자 김정호에 대한 저서들이 꽂혀있었다.
   5․18현장을 목격하면서 대학을 다녔던 그로서는 많은 회의의 시절을 겪었을 터이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전국토를 발로 밟는 길을 택했고 운주사, 황토현, 백아산, 월출산을 밟으며 흙의 소리를 듣고 강토의 역사를 눈으로 보았다. 그가 잡은 대 주제는 <땅의 역사>였다.
   담양의 대나무와 소나무를 화폭에 옮겼고, 운주사의 석불, 황현과 최익현의 초상화를 시각화했으며, 역사의 피어린 한을 여전히 담고 있는 <월출산>, 빨치산의 <일어서는 백아산>으로 표출되었다.
   그의 정신의 깊이와 역사의식은 담양의 가사문학 선비정신과 함께 무르익었다. 그는 세태에 따라 외부지향적 시류에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담양의 선비문학과 정신 가사문학의선비적 가치에서 자기작품세계의 해답을 찾으려고 침잠하고 침잠하며 깊이 들어갔다.
담양의 면양정, 식영정, 소쇄원 등의 가사문학 산실은 바로 그의 작품 소재가 되었고 과거의 정신이 현대적 미학으로 살아났다. 그는 가장 현대적인 것을 과거와 전통에서 찾았다.
   또한 주목 할 것은 서양의 물감과 재료를 쓰면서도 한국전통회화의 방법을 도입하여 융합시키려하였다. 그리고 물상의 형태를 긁어내는 분청사기의 조화彫花기법과 박지剝地기법을 활용하고, 귀얄분장의 흘림으로 화면을 생동감 있게 구축해왔다. 그것이 송필용이 전통과 현대, 동과 서를 아우르는 작품 제작 정신이다. 이번 금강산도와 폭포가 돋보이게 성공한 것도 이점에서이다.
   겸재 정선은 당시 북종화와 남종화를 우리 식으로 받아들이고, 중국의 것을 받아들이되 우리의 것을 창출하려하였다. 배타가 아니라 수용하면서 거기서 새로운 세계를 열었고 겸재의 위대한 점은 이러한 여러 문화와 화풍을 받아들이되 우리 것을 만드는 ‘창조적 능력’에 있었다. 그는 한번도 안주하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탐구적 실험을 계속하였다.
   내가 지켜본 송필용 또한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모색하고 실험하는데서 그의 작가적 가능성을 무한히 발견하게 한다. 일찍부터 그는 겸재를 사모하며 그를 가까이 하고자 했고, 기본적으로 국토사랑, 전통정신과 가치의 존중이 바로 그 작품 사상의 핵이 되었다고 본다.
  그의 1999년 초 금강산 탐승은 그의 작품세계에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한 것 같다. 그는 금강산은 ‘자연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가 보는 금강산은 “우리 땅의 정신성이 짙게 흐르고 세상의 모든 가치가 피어나는 것처럼 숭고함과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영혼의 울림”이었음을 이미 그 곳에서 간파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폭포에 주목하였다. 마치 겸재가 <박연폭>, <비룡폭포>, <여산폭>, <구룡폭> 등에 주목하였듯이 말이다.

   “수많은 물방울의 낙하가 모여서 웅장한 폭포가 되어 잠자는 땅을 흔들어 깨우듯이,
    거침없는 폭포수는 모든 인간의 찌꺼기를 시원스럽게 씻어주고 있었다“

   그는 폭포를 단순히 폭포로만 본 것이 아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사유의 흐름이다. 물이야말로 우주의 오묘와 원리를 담고 있는 철학이자 도이기도 하다. 그에게 폭포는 육화된 존재이며 영혼의 소리를 담아내는 대상이다. 그것은 외양의 형상이 아니라 내면의 깊고 깊은 정신세계이다. 그는 금강산을 통하여 예술의 진미를 깨닫고, 폭포를 통하여 물성을 넘어선 정신과 신비의 내면을 나아갔으며 그의 그림이 구상을 넘어 추상이 되고 추상을 넘어 득도의 길로 가는 통로가 되는 이유이다.
   그 점에서 이번 그의 전시는 형사 形似에서 전신傳神으로 가는 전환의 도정이라 하겠다.
       
         이석우(겸재정선미술관장)

자연과 전통, 그리고 법고(法古)와 창신(創新) 사이-이태호
자연과 전통, 그리고 법고(法古)와 창신(創新) 사이
송필용의 달빛매화 개인전에 부쳐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법을 토대로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낸다는 법고창신은 잘 알다시피 조선후기 실학파의 커다란 과제의 하나였다. 이것이 최근 송필용 화백의 화두이자 작업들의 으뜸 키워드 같다. 민화를 패러디하거나 불탑이나 옛 문화유산을 원용한 우리시대 이야기 그림부터 가사문학의 현장 풍경, 금강산, 폭포, 매화의 그림에는 충분히 그런 노력이 엿보인다. 담양에 작업실을 마련한 때가 1989년이라니 법고창신을 화두삼은 게 벌써 20년을 훌쩍 넘긴 셈이다.  
송강정 · 식영정 · 소쇄원 등 가사문학의 풍경화들은 부감한 들녘에 배치하여 대지와 시의 서정을 넓게 보여주었다. 금강산 그림들은 흰색 물감을 덧칠한 뒤 긁어내는 겨울 산수화로 분청사기의 기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폭포그림은 마치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 그림처럼 곧게 뻗어 내리는 소리의 이미지를 형상화해내곤 했다.
이들 못지않게 송필용이 법고창신을 캔버스에 구현한 것은 붓질이다. 분명 서양화 재료를 사용함에도 탄력 넘치는 붓질 감각은 수묵화의 모필 맛이 흠씬하다. 흐르는 물 닮은 수류필법(水流筆法)이라 할 만하다. 왕성한 작업 가운데, 송필용의 필력은 거의 달인의 수준에 이른 듯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최근 몇 년간의 매화그림이 이를 잘 말해준다.

송필용의 매화그림은 연조가 깊다. 담양에 들어간 직후부터 조선시대 자연을 노래한 강호시단의 터전인 양산보의 소쇄원, 송순의 면앙정, 정철의 송강정을 탐승하며 만난 매화에서 비롯되니 그렇다. 담양의 매화는 역시 고매의 뒤틀린 맛과 흐드러진 꽃잎, 그리고 청매의 고결한 향기 등 지실정씨 마을 매화밭의 것이 으뜸이다. 1950년 전쟁 때 폐허가 된 마을이어서 매화 필 무렵 지실에는 매화의 아름다움과 스산한 옛 정취가 어울려 묘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필자도 매화 피는 시절이면 늘 찾았던 기억이 새롭다. 화가다운 눈길로 송필용이 이들 매화를 화면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송필용의 매화는 새롭게 태어났다. 조선시대 문인문화 속의 매화를 만나게 된 것이다. 단순히 예쁜 꽃이어서가 아니라 겨울을 딛고 맨 처음 피는 꽃이기에 조선시대 문인들이 매화를 그토록 사랑했다. 고아한 인품의 문인정신을 대변하는 꽃으로 매화를 인식하면서 섬진강변, 선암사 등 잘생긴 매화 찾기로 이어졌다. 송필용이 매화꽃 그림에서 추구한 법고(法古)의 새 정신인 셈이다. 송필용은 늘 아래처럼 이야기한다. 

“담양에 들어가 주로 가사문학의 인문적인 풍경 작업을 하면서 선비정신을 연구하였다. 담양, 선암사, 섬진강가 등 주변의 구석구석 가까이에 있는 매화에 매료되었다. 특히 가사문학관 주변에는 고매들이 많아 더더욱 오랜 시간 관찰해오면서 작업하였다. 20년 이상 매화 작업을 통해 복잡한 현대의 삶에서 함몰되어가는 옛 선비의 정신성을 떠올리곤 했다. 
이리저리 고민하다 매화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나는 예부터 내려오는 매화의 의미 외에도, 새로운 각도에서 매화 닮은 삶을 사유하고 싶다. 매화나무는 못생겼고 기이하다. 자칫 다른 꽃그림과 구분되지 않아 그리기 어렵다. 이런 매화를 그리며 매화의 정신성을 재인식 해본다. 매화그림을 통해 나름의 삶의 방식을 갖고 곧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싶다.”

송필용은 이처럼 법고(法古)의 문인정신으로 매화에 접근하면서 옛 문인화가들의 매화그림을 풍부하게 공부하였다. 수묵모필 터치의 활달한 붓질에 이어 단색조나 빈 배경의 화면 구성이 법고(法古)의 방식을 배운 결과이다. 그런 탓인지 초기 송필용의 매화그림은 그 정신성에 경도되어 딱딱한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옛 매화그림에 대한 공부는 송필용의 회화 세계를 한 단계 높여놓았다.

이번 전시에 가장 많이 선보인, 짙은 청색 울트라마린이나 옅은 하늘색 콤포스블루를 배경으로 한 달빛매화는 얼추 옛 그림 월매도(月梅圖)의 구성을 보여준다. 여기에 붉은색 화면이나 초록색 화면의 달빛매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본디 월매의 밤풍경이란 게 청명하게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이미지이니 송필용이 홀딱 반할만하다. 며칠 전 작업실에 들르니 질릴 정도로 달빛매화 그림들이 가득차 있었다.
20여 년 법고(法古)의 정신으로 그려온 송필용의 매화그림은 어른거리는 달빛 물그림자와 함께 청아한 향기를 품어 안은 것 같다. 시내나 강물에 비친 달과 흰 매화꽃 그림자, 그리고 대작으로 재해석한 매화나무는 옛 그림과는 커다랗게 차이나는 다른 상상력을 끌어내준다. 짙푸른 밤하늘에 뜬 달을 향한 매화가지나 고목매화에 핀 홍매그림의 가지 뻗음이 그러하다.
화면 가득한 매화 줄기의 표현에는 생명력이 넘친다. 거칠고 투박한 붓질로 큰가지 표현을 마감하고 원근감을 살린 잔가지의 사실감 묘사는 더욱이 창신(創新)의 개성미를 돋보이게 한다. 줄기와 가지의 대범한 표현에 대비시킨 단아한 육질의 꽃점들은 농담의 변화를 살려가며 겨울과 봄 사이의 공기감을 호흡하게 해준다. 100호 200호 대작의 감명도 새롭다. 그런 탓에 송필용의 매화그림은 늘 법고(法古)보다 창신(創新)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이처럼 송필용의 달빛매화는 현실 자연에서 눈에 보이는 매화꽃나무와 전통적인 묵매도의 형식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럼에도 송필용의 매화그림에는 옛 문인들이 추구한 매화의 정신성과 서양화법이 충돌하지 않는다. 송필용이 20여 년 동안 담양 땅을 거닐며 옛 문인들의 산수문예를 쫓고 담양 매화를 그려온 마음자리 때문이다. 또 단순한 매화 사랑이 아닌 열정스레 쏟아낸 엄청난 작업량의 결과이기도 하다. 송필용의 달빛매화는 분명 추사 김정희 같은 옛 문인이 제기했듯이 철저한 장인정신과 조우한 것이다. 이는 송필용의 회화적 미더움이자, 가장 돋보이는 창신(創新) 기량이라 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