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가시적 세계로 올라온 바다의 내부_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이근화- 가시적 세계로 올라온 바다의 내부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바다는 거대한 질료덩어리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까지 꽉 채워진 하나의 물이고 수많은 생명체가 서식하는 장소이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을 거느린 신비한 공간이다. 모든 생명체는 바로 그 공간에서 발아되었다. 인간 또한 심연에서 수면 바깥으로의 생명의 진화라는 동선을 밟아왔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시선에서 바다의 내부는 배제되고 차단되어 있다. 인간의 몸과 눈은 바다의 심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또한 인간의 생은 수면 위로 한정되어 있기에 바다의 심층부는 삶에서 분리된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영역은 부단히 인간의 삶과 접속되어 있기도 하다. 한편 우리가 보는 바다는 오로지 표면, 표피층의 물일뿐이다. 그래서 저 안쪽에 대한 시선의 갈망과 욕망은 무척이나 항구적이다. 물론 우리는 일정한 장치를 이용한 잠수를 통해 바다 속으로 들어가 그 내부를 볼 수 있다. 바다의 내부가 가시적 공간으로 열린 것은 오래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영상과 사진을 통해 혹은 스쿠버 다이빙 체험을 통해 바다 속을 빈번하게 체험한다. 비가시적 세계가 가시적 세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물론 그 내부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인간의 몸이 지닌 신체적 한계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이만을 바다는 허용한다. 저 안쪽은 아직도 마냥 어둡고 깊어서 여전히 미지의 것이다.  

 이근화는 바다의 내부 풍경을 그렸다. 사실적 재현과는 좀 거리가 있는 풍경이다. 햇빛이 들어오는 수면 바로 밑의 풍경이 주를 이루며 밑에서 위를 올려다 본 부감의 시선 아래 펼쳐진 공간인데 무엇보다도 태양 빛이 수면 내부로 파고들어 환하게 비추고 있는 장면을 다소 환상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그로인해 신비스럽고 장엄한 바다의 내부가 설핏 열리는 체험을 안긴다. 그 공간으로 보는 이들을 마냥 잡아당기는 편이다. 그래서 관자들은 마치 바다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다가 그 위쪽을 올려다보는 듯한 시각 체험을 공유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마치 양수 속에 자리했던 아득한 원초적 기억을 새삼 느끼면서 물속에 잠겨있는 환시에 젖어들기도 할 것이다. 작가는 수면 위의 햇살, 빛이 바다의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어오는 순간과 그로인해 환하게 밝아진 내부 공간, 그리고 그 곳에서 무수한 물고기 떼가 왕성하게 몰려다니는 장면을 표현했다. 더불어 위에서 내려오는 빛으로 인해 형언하기 어려운 색상으로 뒤척이는 바다 속의 내부를 시각화시키고자 한다. 색채로 번안하고자 했다. 물고기 떼가 집단적으로 유영하며 몰려다니는 이 장면은 영상과 사진을 통해 비교적 빈번하게 접했던 장면인데 작가는 이를 새삼스레 회화적으로 재연하고 있다. 아마도 바다 속 그 장면이 작가에게는 매혹적인 장면이자 경건하고 숭고한 체험을 안겨주었던 듯하다. 동시에 많은 생각거리를 거느리게 했던 것도 같다. 자연은 인간에게 자신의 근원을 일깨우는 거대한 텍스트이자 동시에 미적인 사유를 촉발하는 매개들이다. 아마도 작가는 바다 속을 몰려다니는 그 생명체의 군집, 싱싱한 생명력과 신비스러운 자연의 이치, 장엄하고 숭고하기도 한 그 장면에서 큰 감동과 깨달음을 받았던 것도 같다. 개별적인 개체와는 다른 집단적인 물고기 떼가 보여주는 힘, 속도와 방향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이미지, 지상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수면 아래에서만 볼 수 있는 빛과 색채의 파노라마적인 변화, 물고기들이 자아내는 기이한 선과 동세, 변화무쌍한 움직임 등은 더없이 매력적인 장면이기에 자신이 접했던 바로 그 풍경을 ‘표현’하기로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작가가 재현한 이 풍경은 실재 하는 풍경이면서 동시에 작가의 상상이 어느 정도 가미된 장면이다. 우선 작가는 자신이 보고 기억한 장면을 다시 복기하고 있다. 사실 작가는 직접 물속에 들어가는 스쿠버 다이빙을 통해 잠수를 한 기억, 그 경험에 기반 해서 이 같은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환상적이랄까, 현실계를 넘어서는 고양된 분위기를 극화하고 있다. 그것은 이 특정한 장면에서 받은 모종의 메시지를 서술하고자 하는 욕망에 기인한다. 그것이 작업의 주제일 것이다.  

 작가는 주어진 사각형의 캔버스를 바다 속으로 치환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블루 색상으로 칠해진 화면은 그대로 바다를 지시한다. 청색과 흰색, 그리고 언어와 문자로 지시하기 어려운 색채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것은 빛으로 인해 파생된 색의 스펙트럼이다. 바다의 내부는 물이라는 질료이고 그것은 거대하게 출렁거린다. 또한 빛에 의해 무수한 색상으로 산란하는데 그것은 블루 안에서 미묘한 변화를 거듭한다. 그러한 색채의 변화와 물속의 여러 흐름을 청색을 비롯한 다기한 색상과 신체적 호흡을 동반한 붓질로 문질러내 표현한 후에 은색 등을 입힌 단단한 물질(오브제)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물고기의 몸체를 연상시키는 형체로 오려낸 후 캔버스 표면에 부착했다. 평면 위에서 약간의 높이로 올라와 붙은 이 오브제는 촉각적이고 부조에 해당한다. 표면에 실제성을 발생시키고 회화에 조각이 개입된 형국을 만든다. 그 작은 단위들은 제각기 크기/위치를 달리하고 있다. 얼핏 봐서는 규칙적이고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무수한 변화를 보여주면서 제각기 다기한 양상을 자아낸다. 그것은 거대한 집단 안에서 개별적인 자아들의 초상을 보는 듯도 하고 집단적인 욕망의 회로 안에서 고유한 자아의 생을 도모하려는 절박한 자리를 보는 것도 같다. 물론 그것은 보는 이의 욕망과 해석에 따른 것이다. 작가는 다양한 생각에 잠기게 한 이 장면을 의미 있는 것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캔버스 표면에 붙은 작은 오브제들은 흡사 거대한 군집으로 몰려다니는 물고기 떼를 연상시켜주고 있다. 착시를 자아내는 일종의 트릭이다. 따라서 화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실제 바다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환영에 빠진다. 이 환영은 사실적인 재현술에 입각한다기보다 그럴듯한 장치에 기인한다. 이근화의 작업은 이처럼 캔버스에 그려지는 회화적 작업, 그 위에 얹혀진 조각적인 작업, 그러니까 오브제를 활용하는 입체적인 작업 등이 두루 얽혀서 보다 효과적인 해저의 분위기와 자연의 이치와 생명체의 존재 방식 등을 실감나게 전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와 연출방식이 페인팅과 입체(저부조)의 긴장관계와 조화 속에서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배치되고 연결되느냐가 작업의 관건이 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궁극적인 의도는 저 물고기 떼로 대변되는 생명력의 표현에 있어 보인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본성은 삶에 저촉되는 모든 것에 대한 강렬한 공포를 지니고 있으며 우선적으로 자기 생명을 어떤 식으로든 보존하고자 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작가는 깊은 바다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들이 보여주는 저 싱싱한 생의 리듬, 활력적인 율동, 무서운 생명력, 본능적인 생존의 지도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이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자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고 있는 속성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에서 나온 소회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인간의 시선이 온전히 미치지 못했던 영역, 그래서 현실계와 무척이나 다른 신비스러운 바다 속 공간을 가시적 세계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그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생명체들이 벌이는 현란한 생의 약동을 독특한 조형적 방법론 아래 펼쳐 보이고 있다.  

자연의 찬가를 노래하는 이근화의 회화세계-마리-크리스틴 뷔르기요
자연의 찬가를 노래하는 이근화의 회화세계

이근화 작가는 인상주의의 대부가 영감을 받았던 이 주제가 동양 문화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을 나름대로의 연구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인식시켜주면서, 모네가 백수련 연못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지베르니의 정원을 관통하는데 수로를 실제로 존재하게끔 공권력을 움직이는데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음을 상기시켜 주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회화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이 식물을 번식시키겠다는 생명력이 담긴 의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탄생에서 수확까지>의 과정에서 인간의 조건들과 결부된 계절의 리듬을 연상시켜 준다. 각각의 생생하고, 따사로우면서도 열정적인 존재로 표현된 시간이란 존재는 그녀의 탐색과정을 통해서 빛으로 대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근화 작가는 숲 속에서 그녀만의 <작은 꽃나무> 인 수련을 선택하였을 무렵에, 스스로 겸허한 증거로 승화시켜 우리들에게 그녀의 연약한 본질뿐 만 아니라 자연의 위대한 힘까지도 묘사하고자 한다. 그녀의 회화작품들에서 나는 새콤한 사탕 맛을 느끼며, 빛의 흔들림에 감각적인 영감을 받은 회화 작가들에게 지속해서 영감을 불러 일으키고, 인상주의 사조를 압도하는 상징으로써의 연꽃으로 거듭나기들 기대하면서 조급한 마음으로 그녀의 차기 작품들을 재발견하고 싶다. 
이근화 작가는 이 빛을 때로는 그녀만의 붓의 터치로, 때로는 바짝 눌러서, 때로는 형체를 무시하고 때로는 선으로 진동시킬 것이며 그녀의 작은 우주와 마찬가지로 빛의 미립자나 세포의 생명에 이르기까지의 계획을 완성시킬 것이다.
나는 또한 내 눈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보석과 다름없는 <오후의 햇살>이라는 작은 작품에 주목하게 되었다. 하루가 끝나는 이 특별한 시간에 태양이 지는 순간을 포착한 이 작은 회화작품은, 색채뿐만 아니라 태양의 움직임이 수련의 잎새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과정을 통해서 존재하는 빛이 더 이상 어둠과 강렬하게 투쟁하지 않고 서로에게 스며들어 화해하는 경지를 완벽하게 다룸으로써, 작가의 회화적 저력마저 느끼게 해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나는 이 위대한 화가가 대범하게도 <녹색>을 확신을 갖고 통제하여 근원적인 방법으로 그녀만의 색으로 감히 소유한 점을 부각시키고 싶다. 내가 아는 한, 이 색은 매우 강렬하게 대조되거나 변질될 가능성이 높은 색이다. 매우 부정적인 각도에서 느닷없이 튈 수도 있는 색이다. 하지만 그녀는, 차라리 청록색이나 황록색으로 처리하는 편이 용이하다고 생각되는 매우 중요한 표면에다가 뜻밖에도 황색과 파란색을 사용하여 완전하게 균형을 줌으로써, 이 색에 취할 정도로 빠져들게 하고 도저히 걸 수 없는 내기임에도 불구하고 승부수를 던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여기서, 녹색은 충만한 빛으로 존재한다. 이 색은 마치 공간을 지배하듯이 압도하는 색이며, 확실하고 자신에 찬 그녀만의 색이다. 그 빛은 자연의 찬가를 노래하는 이근화 작가의 회화세계에서 고유한 색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모든 아름다움을 간직하며, 이는 여성의 아름다움과 상통한다.
자연에 대한 탐사를 낭만주의에서 차용한 그녀는, 우리들에게 인간적인 조건뿐만 아니라 우리 미술사적인 면에서도 감동적인 순간을 경고해 주고 있다. 이 무한히 축소될 것 같았던 수련 밭이 갑자기 우리에게 거대한 존재로 다가서며, 아직도 지대한 관심을 끌 자격이 있는 이 산책길로 초대한 작가에게 감사를 보낸다.
아울러서, 자연은 그 근원적인 존재 명분이 인류를 위해서 있다는 점만으로도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경외감을 느낄 필요가 있다는 고귀한 경종에도 감사를 보낸다.
그리고, 그녀의 겸허함에 영예를 돌리는 마음에서 나는 단지 축하와 감사하다는 글을 남기고 싶다.

파리에서, 평론가 마리-크리스틴 뷔르기요

수련(睡蓮)을 붓끝으로 수련(修練)하는 빛과 색의 조련사-김구현
수련(睡蓮)을 붓끝으로 수련(修練)하는 빛과 색의 조련사 

“이 수련 밭의 마술 가운데 일부를 보이는 대로 요약하면, 고독 속에 흩어져 있는 공허한 상태에서 마치 갑자기 한 장소에 대한 기억을 뽑아내기라도 할 것 같은데, 연잎 사이사이로 언뜻 보일락 말락 드러난 흰빛의 굴곡을 감싸며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을 행복과 무념에 젖어들게 한다.”                 -스테판 말라르메, <하얀 수련>에서-

이근화는 그녀의 작가노트에서, “수련과 연꽃은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인간 세상에서는 경험 할 수 없는 듯 맑고 깨끗한 세계로 빠지게 하는 힘이 있다”고 피력한 바 있다.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에는, 프랑스 속담 속의 ‘위대한 정신은 서로 만나게 되어있다’는 표현이 실감날 정도이다. 그만큼, 이근화 작가의 여성적이고도 세밀한 감성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프랑스 문호의 수련에 대한 미학적 시각과 근접해 있다. 

그녀의 작품성에 대해서 살롱 앙데팡당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장-모노레 미술평론가에 따르면, “한국에서만 서식하는 식물들을 주제로 하는 정물화를 통해서 유럽인들에게 한국의 계절을 분명하게 느끼게 해주는 작가”로 언급한 바 있다. 파리 문화계의 대모(代母)로 통하는 마담 푸조는, “프랑스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거장 모네의 수련이 남성적인 표현에 가깝다면, 이근화 작가의 수련은 중세 르네상스의 거장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연상시켜 주는데다가 작가의 여성적인 선의 흐름에 주목”하여 그녀의 초대전을 유치할 정도였다. 

여기서 이근화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을 예로 들어보자. 그녀는 “연꽃은 맑은 물이 아니라 진흙탕 속에서 피는 꽃이다. 연꽃이 핀 곳은 그 꽃으로 인하여 맑은 물로 정화 된 느낌마저 들게 한다.”고 하였다. 과학적으로도, 연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흙탕물에 산소를 공급하면서 정화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근화 작가는 그녀 안에 잠재되어 있는 모성적인 본능을 수련을 통해서 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련의 내면세계조차 묘사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근화 작가는 이미 여러 차례의 파리전시회를 통해서, 프랑스 화단에서는 널리 활동 중인  한국의 중견 작가이다. 국제적인 전시기획가이자 평론가인 제라르 슈리게라는 이근화 작가와의 만남에 대해서, “지금 전 세계 현대미술시장을 ‘인해전술’ 식으로 휩쓸면서 주목받고 있는 중국적 상업미술과 철저하게 대비되는 작품 경향을 보인다.”고 마치 화두처럼 툭 던지면서, “전통적인 동양 미술의 정신세계와 현대적인 회화코드를 동시에 간직한 작가”라고 무척 고무적인 한마디를 덧붙인 바 있다.

또한, 프랑스 고유의 경매시장인 ‘드루오 경매’에서 최고의 지명도를 뽐내고 있는 삐에르 코르넷-드-쎙씨르 경매사의 총애를 받으면서 고정 출품하는 작가이자 평론가로도 활동하는 마리-크리스틴 뷔르기요 역시 이근화 작가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녀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무너뜨려버린 이근화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색채뿐만 아니라 태양의 움직임이 수련의 잎 새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과정을 통해서 존재하는 빛이 더 이상 어둠과 강렬하게 투쟁하지 않고 서로에게 스며들어 화해하는 경지를 완벽하게 다룸으로써, 작가의 회화적 저력마저 느끼게 한다.”고 상기된 표정으로 강조하였다. 
이근화는, 마초이즘과 편견으로 물든 한국 미술계 속에서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특유의 긍지와 노력으로 뛰어넘은 작가이다. 특히, 이근화 작가의 작품성이 국내보다 프랑스 화단에서 더욱 더 주목받고 있는 점에서, 그녀의 모성을 부담 없이 표출할 소재로서 ‘수련’을 고집하는 작가의 선택은 오히려 지혜롭고 탁월할 정도이다.

자신의 작품을 남과 비교하는 작가는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이 넘치는 작가는 오직 앞만 바라보고 정진할 뿐이다. 이근화는 후자에 속하는 작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만의 추진력과 결합하여 언어의 은유기법을 초현실주의 풍으로 표현한 작품이, 푸조 아트센터에서 주관한 국제공모전에서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받아 회화 부문 특별상을 수상한 것이 아닐까.

김구현(Commissaire d'exposition : 전시기획자)

초의식의 연꽃에서 무의식의 바다로 잠수하다-박정진
초의식의 연꽃에서 무의식의 바다로 잠수하다

                           박정진(예술인류학 박사, 미술평론가)
 
이근화의 그 동안의 그림을 보노라면 왠지 캔버스의 밑에서 에너지가 꿈틀대고 있었고, 언젠가 그 응결됨이 솟아오를 것 같았다. 도대체 그 힘의 근원은 무얼까. 그림 그리는 것이 재미있어서, 아니면 그리지 않고 못 배기는 그 무엇이 있어서일까. 아마도 둘 다 일 것이다. 그녀가 ‘자연의 찬가’ 시리즈를 통해 ‘연꽃’을 그릴 때만 해도 그 초월이나 생략함이 대담하다고 느꼈다. 물론 빛을 요리하는 솜씨는 어느 경지를 넘어 있다. 

특히 그녀가 2007년에 선보인 ‘자연의 찬가-기억’(제 6회 개인전, 인사아트 센터)은 낙조의, 어둠을 향하여 가면서도 마지막 안간힘을 발휘하는 찬란한 연꽃들의 황금빛 울림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했다. 꽃들은 난숙한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마치 다리 긴 새들의 낙조의 군무를 보여주듯 황혼의 찬란함을 합창하는 듯했다. 
그것은 그녀의 초의식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꽃들은, 이파리들은 이제 날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황금빛은 영원을 상징한다. 연꽃 작업들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급기야 초의식으로 올라가 태양과 싸우고 있었다. 어둠의 그늘이 조금씩 드리우긴 하지만, 황금색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이게 빛과의 표면에서의 싸움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초의식으로 적절하게 자기를 자재하고 있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어느 날 만난 그녀는 바다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바다는 무의식이 아닌가. 원래 초의식과 무의식은 의식을 기준으로 보면 서로 먼 거리에 있는 것 같지만 돌아서면 바로 경계에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녀의 초의식은 이미 무의식을 절반 정도 담고 있었던 셈이다.
 

이번 전시회 작품으로 내놓은 ‘바다 속 흐름’ 작품들은 그녀가 이제 초의식에서 무의식으로의 긴 여행에 들어간 사실을 선전포고 하는 듯하다. 그녀는 폭발(explosion)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여름, 새로운 세계를 위해 제주도에서 스쿠버 다이빙에 도전했다. 바다 속을 1시간씩 잠수하기도 했다. 거기엔 그의 표현을 빌리면 ‘지구상에서 인간과 같이 살아가는 또 다른 경이로운 세계’가 있었다. 
. 그가 이번에 내놓은 가장 큰 대작 ‘바다 속 흐름’(162×112cm)은 해저에서 볼 수 있는 작은 물고기들의 떼거지와 그것이 바다 속 흐름과 함께 휘돌아가는 기세로 인해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입체가 아닌가. 종이에 십여 차례 덧칠을 하고, 그것을 바탕에 세워 해저의 에너지를 표현했다. 
입체가 주는 깊이와 강도, 아크릴과 유화의 자유자재한 활용이 돋보였고, 바다 속 이미지들은 자연그대로가 아닌, 재구성 화면을 보여주었다. 산호의 붉은 색, 수초의 녹색을 화면의 바탕색으로 삼는가 하면, 화면을 다층적으로 구성했다. 
바다 속 자체가 이미 다층적이다. 음양의 다원다층의 미학이 바다 속에 그대로 숨어 있다. 아마도 이런 것들은 바다 속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무의식의 동시 표출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해저는 깊이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다채롭기 그지없다. 짙은 푸른색인가 하면, 에메랄드 색이고, 여기에 석양을 받으면서 지나는 물고기는 온통 붉은 색이다. 
. 아마도 그녀의 바다와 무의식의 여행은 앞으로 계속 될 듯하다. 바다는 지구의 4분의 3의 세계이다. 그동안 4분의 1에 머물다가 4분의 3에 도전하는 셈이다. 지금까지 그는 빛에서 어둠을 그렸지만 이제 어둠에서 빛을 그릴 차례이다. 어둠에서 빛을 요리하는 솜씨도 기대해본다.




초의식의 연꽃에서 무의식의 바다로 잠수하다2-박정진
초의식의 연꽃에서 무의식의 바다로 잠수하다

                           박정진(예술인류학 박사, 미술평론가)



의식은 그 빛으로 인해, 혹은 시각으로 인해 사물을 대상으로 보지만 무의식은 사물을 대상으로 보지 않기 시작한다. 쉽게 말하면 물(物)로, 물 자체로 본다. 물은, 물 자체는 대상이 아니다. 대상이 아님으로써 도리어 대상을 물화(物化)한다. 물화란 애니미즘(animism)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다. 물 자체의 정령(精靈)들과 놀며, 드러나는 형상은 단지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이제부터 그가 무엇을 그려도 그것은 단지 그리고 싶은 욕망 그 자체이다. 무엇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표출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림은 단지 그 결과일 따름이다. 
바로 그는 이제 무의식의 바다에 침잠하고 있고, 유영하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관계이다. 사람에 따라 둘은 교차하기 때문에 의식이 다인 경우도 있고, 무의식이 다인 경우도 있다. 아마도 그에게서도 이것은 교차할 것이다. 
이번 개인전으로 내놓은 ‘바다 속 흐름’ 작품들은 그녀가 이제 초의식에서 무의식으로의 긴 여행에 들어간 사실을 선전포고 하는 듯하다. 그녀는 폭발(explosion)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여름, 새로운 세계를 위해 제주도에서 스쿠버 다이빙에 도전했다. 바다 속을 1시간씩 잠수하기도 했다. 거기엔 그의 표현을 빌리면 ‘지구상에서 인간과 같이 살아가는 또 다른 경이로운 세계’가 있었다. 
바다는 아마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항상 소용돌이치고 솟아오르는 마그마를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번에 내놓은 가장 큰 대작 ‘바다 속 흐름’(162×112cm)은 해저에서 볼 수 있는 작은 물고기들의 떼거지와 그것이 바다 속 흐름과 함께 휘돌아가는 기세로 인해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입체가 아닌가. 종이에 십여 차례 덧칠을 하고, 그것을 바탕에 세워 해저의 에너지를 표현했다. 
입체가 주는 깊이와 강도, 아크릴과 유화의 자유자재한 활용이 돋보였고, 바다 속 이미지들은 자연그대로가 아닌, 재구성 화면을 보여주었다. 산호의 붉은 색, 수초의 녹색을 화면의 바탕색으로 삼는가 하면, 화면을 다층적으로 구성했다. 
바다 속 자체가 이미 다층적이다. 음양의 다원다층의 미학이 바다 속에 그대로 숨어 있다. 아마도 이런 것들은 바다 속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무의식의 동시 표출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해저는 깊이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다채롭기 그지없다. 짙은 푸른색인가 하면, 에메랄드 색이고, 여기에 석양을 받으면서 지나는 물고기는 온통 붉은 색이다. 
바다 속은 생명의 원초적인 향연이었다. 형체가 무색할 정도로 미세한 생명들이 폭발하는 기운으로 뭉쳐져 있고, 휘돌고 있으며, 또 하나의 기상도(氣象圖)와 마찬가지이다. 생명의 탄생의 원시성이 고스란히 보존된 자궁과 같다. 심해의 현란한 열대어들의 떼거지 이동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혹시 그녀가 이제야 자신의 표현하고자 하는 본래의 영역을 찾은 것인가. 아니면 끝없는 여정의 일부로, 흔적으로 둘 것인가는 그녀의 몫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상들은 그녀가 표출하고자 하는 에너지들의 편린들이다.
아마도 그녀의 바다와 무의식의 여행은 앞으로 계속 될 듯하다. 바다는 지구의 4분의 3의 세계이다. 그동안 4분의 1에 머물다가 4분의 3에 도전하는 셈이다. 지금까지 그는 빛에서 어둠을 그렸지만 이제 어둠에서 빛을 그릴 차례이다. 어둠에서 빛을 요리하는 솜씨도 기대해본다.